新溟 李相洙 博士님의 학문 세계와 업적
이민희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新溟 李相洙 교수님은 1960-2000년대 초에 걸쳐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물리학내의 光學 및 레이저 분야에서 그 학문적 명성이나 업적은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학자입니다. 이 교수님은 한국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후진의 우뚝선 師表입니다. 이러한 이 교수님에 대하여 弟子인 필자가 스승의 업적과 흔적에 대하여 글을 쓴다는 것이 그저 죄스럽고 민망할 뿐입니다. 하지만 40여년 가까이 교수님 곁에서 지도와 사랑을 받고 지낸 제자로서 더 큰 존경심과 추모의 정을 갖게 되어 아는 데로 교수님의 지나온 과거사를 기술하여 이 교수님을 아시는 知人께서 보시고 다시 한번 이상수 교수님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성장 배경
이상수 교수님은 일제치하인 1925년 10월 4일 咸鏡南道 新興郡 永高面 松下里에서 父親 李大關公과 母親 朴壽岩女史의 次男으로 태어나셨다. 咸興商業學校에서 공부를 하시며 유소년기를 지내셨다. 광복전후 이교수님은 江陵測候所長이셨던 父親과 함께 溟洲郡 江陵에서 얼마동안 지내셨다. 고향과 유소년기를 그리워 하셨던 노스탤지어적 心胸이 교수님의 雅號 “新溟”을 탄생시킨 것 같다. 항시 眞率하고 素朴하신 이 교수님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근대문명의 여명을 맞았습니다. 장로이시고 측후소장이신 부친의 영향으로 新興, 江陵 같은 벽지에서 同鄕 물리학자이신 都相錄교수를 흠모하시고 물리학자의 꿈을 키우셨다고 들었습니다. 1949년 6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시고 이듬해 6월 대학원 물리학과 1년을 수료하신후 물리학과에서 강사로 처음으로 교단에 서셨다. 1953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수로 재직중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 출신의 徐淑源女史와 1955년 5월28일 결혼하셨다. 결혼하신후 채 한달도 되기 전에 이교수님은 영국문화원의 장학금을 받아 단신 영국으로 유학길을 떠나셨다.
영국 런던대학교의 Imperial College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현 Imperial College-London) 물리학과에서 연구를 시작하셨다. 당시 Imperial College에는 색체과학의 대가인 William David Wright(1906~1997)가 Chair of Applied Optics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광학설계의 대가인 W. T. Welford(1916~1990), 수차이론으로 유명한 H. H. Hopkins(1918~1994), 홀로그래피에 대한 연구로 1971년 노벨상을 수상한 D. Gabor(1900~1979), 극초단파 레이저의 권위자인 D. J. Bradley 등 광학분야에서 세계에서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이 교수와 연구활동을 하고 있었다. 학생으로는 후일 remote sensing의 대가인 Philip N. Slater(현 Univ. of Arizona 명예교수), 측광분야의 대가였던 D. A. Palmer(1933~ 2000) 등이 동문 수학한 사이다. 이교수님은 W. D. Wright의 지도를 받아 광학박막에 대한 연구로 1959년 6월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학위논문제목은 `An Investigation of the Optical Phase Changes in Thin Films during Refraction'이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광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이교수님께서 Imperial College에서 수학하시면서 맺은 인맥으로 인하여 후일 한국이 국제광학위원회(ICO) 가입 등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유학시절에 대한 일화중의 하나를 필자에게 들려주신 적이 있다. 유학가실 때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하여 해군 단화를 사서 신고 영국에 가셨는데 영국 친구들의 `Are you navy?' 라는 놀림을 많이 당했노라고 말씀하시면서 4년동안 신고난 뒤 귀국길에 배를 타고 오시면서 하도 속이 상해서 태평양 바다에 던져버렸다면서 잠시 과거의 감회에 젖으신 모습을 본적이 있다. 귀국후 원자력연구소로 직장을 옮겨 1964년 미국의 Harvard 대학으로 혼자 떠나셔서 2년간의 연구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셔서 원자력연구소장직을 맡게 되셨다. 이 때 결혼후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장장 7년 가까운 시간을 사모님께 독수공방시킨 것 때문에 항시 사모님에 대한 애틋함을 필자가 결혼전에 예비신부와 교수님을 연구실에서 뵈었을 때 언뜻 언뜻 그 속마음을 내 비추어셨다. 이 교수님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내력을 이어받아 사모님과 함께 교회의 장로를 역임하셨다. 이러한 일제하의 유소년기의 성장배경과 종교적 신앙이 바탕이 되어 항시 검소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사랑을 베풀고 엄격한 원칙과 규율을 지키는 것을 일생동안 몸소 실천하는 생활을 하신 바탕이 된 것 같다.
2. 과학교육자로서의 면모
1973년 3월 필자가 과학원 학생으로 입학하면서 師弟의 연을 맺은 이후 과학원에서 필자가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6년, 이후 영면하실 때 까지 40여년간 이상수 교수님 곁을 지켜보면서 필자와 생긴 에피소드나 느낀 점을 통하여 교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소개해 드리고 싶다. 필자가 입학하였을 당시에는 물리학과에 세분의 교수님이 계셨는데 조병하교수님은 행정실장, 김재관교수님은 학생처장의 보직을 맡고 계셔서 이상수 교수님 혼자서 학생 10명을 지도하셨다. 당시 연구동 건물이 완성되지 않아서 6개월간 수업없이 나중에 기숙사로 사용된 건물에서 이상수 교수님이 지정해준 과제를 각자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 필자는 유전체 다중박막에서의 반사율 계산에 대한 과제를 부여 받아 KIST 전자계산소에서 포트란 프로그램을 짜서 계산을 하는데 프린터로 결과를 프린트하여 검토하고 하는데 다층 박막에 대하여 계산을 하다보니 프린터지가 굉장히 많이 실험실에 쌓이게 되었다. 당시 프린터 용지는 수입한 것으로 굉장히 좋은 지질이라 이면지로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하루는 퇴근길에 프린터지의 일부를 휴지통에 버렸는데 다음날 보니 그 종이가 교수님 책상위에 놓여 있는 것 이었다. 평소 절약정신이 투철하신 교수님이시라 이후 필자도 물자를 아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4년에 필자는 과학원에 실험기자재가 도입되지 않아서 공릉동의 원자력연구소 물리학연구실의 진공증착기를 이용하여 박막증착 실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 토요일에 교수님께서 연구소에 함께 가시겠다고 하셔서 아침 일찍 함께 원자력연구소로 출근을 하였다. 토요일이라 1시에 퇴근하므로 점심을 먹지않고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실험을 더하자고 하셔서 결국 오후 까지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실험은 저녁때까지 이어져 결국 밤 11시를 넘기게 되었다. 당시에는 12시 통행금지가 있는 때라 불야불야 퇴근준비를 하여 상계동 서울공대 앞까지 걸어나오니 11시 반 정도 되어 시내버스의 운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합승하여 회기동까지 가까스로 온 다음 통금시간을 넘겨 뒷골목을 통하여 과학원 아파트와 기숙사로 돌아온 적도 있다. 이때 점심으로 교수님이 사갖고 오신 샌드위치 1조각씩을 점심으로 나눠 먹고 하루를 버틴 것이다. 이교수님은 보통 아침8시에 출근하셔서 저녁 8시경에 퇴근하시면서 연구실에 있는 학생들의 그날그날 한일을 일일이 확인하시고 문제가 있으면 같이 토론도 하시며 매일 같이 반복하셔서 그 당시로서는 저녁 시간이 공포의 시간이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정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하신 것을 알 수 가 있다.
행정직원을 통하여 필자가 전해들은 이야기로 초대원장 시절 과학원이 초창기라 업무가 과중하여 매일 야근을 하는데 저녁식사후 잠간 한담을 나누는 것을 이교수님께서 보시면 나랏돈을 쓰면서 잡담을 하고 논다고 불호령이 내려지곤 했다는 것이다. 한편 어떤 직원은 이교수님을 모시고 일하는 것이 무척 마음이 편하다는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이유인적 일을 많이 시켜 몸은 피곤해도 원칙에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므로 마음은 편하다는 것이다. 즉 어떤 업무를 지시하셨는데 그것이 규정에 위배되는 일일 경우 설명을 하면 규정이 고쳐지기 전 까지는 그 규정을 철저히 지키시는 것이다.
직원들에게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분이시면서 학교의 운전기사나 청소하는 분들 소위 요즈음 이야기하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한 없이 따뜻함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교수님을 모시고 학교의 업무용 승용차를 타고 외부기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일이 지연이 되어 퇴근시간을 넘겨서 과학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과학원에 도착하여 내리시면서 `늦게 되어 미안하네, 애비로서 집에 늦게 들어가면 가족들이 많이 기다릴테니 들어가면서 사탕이라도 하나 사서 들어가게‘ 하면서 기사에게 000원을 건네 주시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 날 교수님께서 연구실에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시고 사무실이 지저분하게 되어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불러서 사무실 청소를 시키셨는데 과외로 청소를 시킨 것이라면서 나중에 간식이라도 사드시라고 000원을 건네 주셨다. 정작 교수님 본인은 댁에서 매일 같이 도시락을 갖고 오셔서 사무실에서 드시곤 하셨다. 본인은 한없이 검소한 생활을 하시면서도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 실험실에서 AID차관으로 도입된 연구장비들을 하나씩 설치하고 실험실을 채워나가면서 교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필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했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그나마 교수님과 마주할 수 없는 아쉬움에 어떻게 형언 할 수가 없다.
3. 과학행정 지도자로서의 면모
1959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신 이 교수님은 이듬해 원자력연구소로 직장을 옮겨 물리학연구실장의 직책을 맡아서 당시 가동중이던 TRIGA MARK II 원자로와 관련된 연구를 시작하셨다. Cerenkov 복사에 대한 연구로 원자로 심부에 충만한 Cerenkov 복사의 감쇠양상으로부터 원자로 속의 γ-선 스펙트럼을 결정짓는 연구를 수행하셨다. 또한 Tolansky 간섭무늬를 이용한 광학결정재료의 표면 결함에 대한 연구와 Twyman-Green 간섭계를 이용한 수은의 미세원자스펙트럼을 알아내는 연구를 수행하셨다. 원자력연구소 물리학실장으로서 연구방향설정과 추진계획을 총괄하며 탁월한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1967년 연구소장으로 임명되어 한 기관의 리더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이상수교수님은 여느 과학자와는 달리 과학행정에 대한 법과 원칙을 지키는 투철한 이념을 가지셨고, 그 추진력이 탁월하여 과학행정적 업적은 학문적 업적 이상으로 심대하다고 하겠다. 1968년부터 연구소장으로 재임하시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총회교차수석으로서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원자력 기술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셨다. 1970년 원자력청장으로 부임하시어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다지셨다.
1971년 1월 이상수교수님은 과학자로서의 일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가 된 한국과학원의 초대원장으로 임명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科學立國의 국가적 목표를 이룩하기 위하여 1965년 선진 과학기술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한데 이어 1971년 과학기술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과학원을 설립하여 초대원장으로 이상수박사님을 임명하였다. 당시의 국력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과학기술연구소나 과학원의 설립은 사회 각지에서의 반대와 비판이 극에 달해 있든 시기이다.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상수박사님은 각계각층을 설득하여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생 전원에게 학비면제 및 장학금지급과 병역면제의 혜택을 주고 학생은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는 교수님 스스로 영국 유학 시절 겪었던 경험에서 후학들에게는 불요불급한 고초를 겪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정부의 공업입국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목표에 맞추어 과학원 마스터플랜 작성과 한국과학원 설립 5개년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초기 과학원의 재적학생수 300여명과 50여명의 교수로 출발하는 계획으로 이들이 교육과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연구실의 시설, 기기 및 도서 구입을 목적으로 AID차관 600만불 도입을 추진하여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1년 남짓 과학원 초대원장을 역임하시면서 심혈을 기울려 과학원의 초석을 다지셨다. 1972년 3월 급변하는 국내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원장직을 사임하고 당시 수학 및 물리학과의 교수로서 연구와 교육을 시작하시게 된다. 후일 사석에서 필자에게 원장으로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이 교수와 학생이 교육과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었노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로 보아 학생 전원에게 그것도 대학원과정에서 등록금면제, 기숙사 무료제공, 월 일정액 장학금 지급과 병역 면제를, 교수에게는 원내에 아파트 제공이라는 것이 파격적인 대우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소속기관에서 기관장을 역임한후 그 기관의 임직원으로 계속 근무하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과학원의 원장을 역임한후 과학원의 평교수로 재직하는 선례를 남겨 후일 원장을 역임하신 다른 대부분의 교수님이 교수로 과학원에서 정년을 맞게 되었다.
1980년대초 제5공화국 정부의 산하기관 통폐합 방침에 의하여 한국과학원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된다. 이는 다시 1890년대 말 제6공화국 정부 초에 과학기술연구소 부분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으로 과학원은 그대로 한국과학기술원으로 분리하게 되고, 과학기술원은 현재의 대덕연구단지로 이전을 하게 된다. 또한 대덕연구단지에 별도의 기관으로 설립된 과학기술대학과 통합 과정을 거치게 된다. 두 기관의 분리와 통합, 이전이라는 난제 속에서 구성원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격동기에 이상수교수님은 1989년 2월 다시 한국과학기술원의 6대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때 이상수 교수님은 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추진력으로 무리없이 과학기술연구원과 분리를 마무리하고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하여 과학기술대학과의 통합까지 마무리한 후 1991년 2월 20여년간 재직하신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정년퇴임을 맞이하셨다.
4. 연구 업적
1) 업적개요
이상수교수님은 1959년 영국 런던대학교 Imperial College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현 Imperial College-London)에서 박사학위논문 발표를 시작으로 1991년 정년 퇴임 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1999년 까지 연구생활 40여년간 학술논문 266편, 저서5권, 역서 7권 등 총 278편(권)의 업적을 남기셨다. 또한 한국과학기술원 재직중 59건의 크고 작은 연구과제를 수행하셨다. 1991년 2월에 정년퇴임후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재직하시면서 1999까지 꾸준히 연구활동을 수행하시면서 278편의 연구논문 중 51편의 연구논문을 이 기간에 발표하였다. 이 중 학술논문을 분야별로 보면 파동광학 46편, 레이저광학 49편, 기하광학 48편, 광정보처리, 홀로그래피 및 광섬유 33편, 비선형광학 24편, 광산란 및 분광학 25편, 그리고 해설 및 기타 분야 41편 등 광학의 전 분야에 대하여 논문을 발표하셨다.
이중 266편의 논문에는 광학분야의 세계적 연구동향을 국내에 소개하는 해설논문 11편과 국제학술회의 발표논문 프로시딩 12편이 포함되어 있다. 243편의 원저 학술논문을 살펴보면 원자력연구소 재직시 발표한 25편의 논문중 원자력관련 논문 13편을 재외하면 218편이 광학분야 논문이다.
2) 주요 업적 내용
(1) 파동광학
1959년 영국 Imperial College에서 박막에서 반사시 일어나는 광위상변화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이후 1998년까지 평생을 바쳐서 연구하신 분야중 하나로 모두 46편의 논문을 발표하셨다.
연구논문을 살펴보면 금속 혹은 유전체 박막의 특성에 관한 연구와 간섭계를 이용한 응용분야로 대별된다. 금속 박막의 특성 연구와 유전체 박막의 특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이용하여 금속박막과 유전체박막으로 구성된 간섭필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유전체 다층박막으로 구성된 고반사율을 갖는 반사경이나 간섭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 초에 발명된 레이저의 급격한 발전으로 고성능을 갖는 광학부품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이에 대한 연구가 국내외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지든 시기에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한국과학기술원의 광학연구실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간섭계를 이용한 응용 연구에서는 레이저와 간섭계를 이용한 레이저 Doppler 속도 간섭계에 대한 연구와 이를 응용하여 미소변위를 측정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파동광학분야에서 모두 21명의 석사학위와 5명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배출되었다. 이교수님께서는 정년퇴임 후에도 한남대학교의 장수, 조재흥 교수 등과 optical force, radiation torque등에 대하여 공동연구를 수행하여 13편의 논문을 더 발표하셨다.
(2) 레이저광학
1960년에 미국의 T. Maiman이 루비레이저의 발진에 성공함으로써 광학분야 뿐만 아니라 산업계에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이상수교수님은 1960년대초 원자력연구소 재직시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헬리움-네온 레이저의 개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71년 한국과학원으로 적을 옮기신 후 1975년부터 펄스형 대출력 레이저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는 연속발진 이산화탄소 레이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과학원의 이상수교수님은 펄스형 레이저로 대출력을 낼 수 있는 광분해 옥소레이저와 TEA CO2 레이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옥소레이저에 대한 연구는 1GW 까지 계속하여 출력이 향상되어 당시 러시아와 독일에서 수행한 대출력 옥소레이저 시스템과 성능이 대등한 옥소레이저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 옥소레이저에 대한 각종연구는 물론이고 이를 이용하여 레이저 플라즈마에서 발생되는 x-선 연구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연구가 수행되었다. 파장이 1.3μm인 근적외선 영역의 옥소 레이저와 달리 파장이 10μm의 적외선 영역인 이산환 탄소 레이저에 대한 연구도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고압력 횡여기 방식의 이산화탄소 레이저는 종여기 방식보다 훨씬 소형이면서 대출력을 얻을 수 있는 레이저이다. 대기압에서 횡방향의 균일한 방전을 일으키기 위한 많은 연구가 수행되었다. 1987년에는 정부로 부터 1TW Nd-glass 레이저의 개발을 위한 대형 연구과제를 수주하여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극초단파 레이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75년부터 정년퇴임시까지 레이저와 레이저응용연구로 모두 32명의 석사학위와 14명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배출되어 가장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3) 기하광학
기하광학분야는 이상수 교수님께서 한국과학원 초창기에 파동광학 분야와 더불어 가장 먼저 연구를 시작한 분야이다. 한국과학원의 초기 시작단계에서 연구실험실과 연구용 기자재가 전혀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박막에 대한 계산과 더불어 산업체에서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렌즈설계를 시작하였다. 1970년대부터 복사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산업체에서 카메라 렌즈와 복사기 렌즈의 개발 요구가 급증하여 산업체 수탁연구가 많이 수행되었다. 광학계의 설계뿐만 아니라 광학부품의 성능 평가에 대한 연구도 동시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국내의 반도체 산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리소그래피용 광학시스템의 개발 요구가 증대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리소그래피용 광학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극자외선 영역에서 반사경으로 구성된 리소그래피용 광학시스템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x-선을 사용하는 리소그래피용 반사경형 광학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기하광학 분야에서 모두 8명의 석사와 5명의 박사학위 취득자를 배출하였다. 아래 표1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분야에서 학위 취득자는 상대적으로 적으나 논문 수는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산업체와 공동연구 등이 많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약 반이 정년퇴임 후에 발표된 논문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교수님의 평소 소신이신 순수학문 보다는 국가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응용성이 큰 학문을 추구해온 바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 광정보처리, 홀로그래피 및 광섬유
레이저의 발전으로 가장 급격하게 발전된 분야가 광통신분야일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이상수교수님은 광학적인 방법에 의한 한글자모의 유형인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셨다. 영어의 알파벳 글자의 모양은 원형이 많은 데 비하여 한글의 자모는 선형이 많은 관계로 유사한 자모가 많기 때문에 글자인식이 매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공간주파수 필터링에 의한 방법으로 광학상의 유형인식이나 상회복에 관한 연구를 일찍부터 시작하셨다. 또한 비정질 As2S3 박막을 이용하여 광학상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홀로그램의 기록과 인식, 지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말에 양질의 광섬유가 개발됨에 따라 단일 광섬유나 광섬유 다발을 통한 광학상의 전송 특성에 대한 다양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광정보처리 및 광통신 분야에서 모두 33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석사 9명, 박사 7명이 배출 되었다.
(5) 비선형광학
레이저에 의하여 강한 빛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됨에 따라 물질의 빛에 대한 비선형 현상에 대한 연구가 1980년대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비정질 박막이나 결정체에서 4광파혼합에 의해 발생되는 위상공액파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었다. 위상공액파의 특성은 기존의 광파의 특성과 다른 왜곡보상, 렌즈없는 결상, 실시간 상처리 등에 응용될 수 있다. 또한 여러 물질의 비선형성을 조사함으로써 비선형성을 이용한 응용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분야에서 모두 24편의 연구논문을 발표되었으며 석사 17명, 박사 7명이 배출 되었다.
(6) 광산란 및 분광학
에너지 밀도가 높은 레이저 광속을 이용하여 비흡수성의 유전체 미립자를 광압을 이용하여 공중 부양시키거나 광압력을 이용하여 가속, 포획, 냉각시키는 연구가 수행되었다. 미립자에서 산란된 광속을 통하여 입자의 절대 크기를 알 수 있고 동시에 광학적 특성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물질의 흡수선폭이나 수명시간 측정을 통하여 레이저 매질로 사용 가능성을 밝히고 또한 발진 특성을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분야에서는 모두 25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되었으며 12명의 석사와 6명의 박사 학위 수여자가 배출 되었다.
(7) 해설 및 기타
이상수교수님은 박사학위 취득후 10여년을 원자력연구소에서 재직하셨다. 연구소에 재직하면서는 주로 Cerenkov 복사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원자로심부에 많은 Cerenkov 복사의 감쇄양상으로부터 γ-선 분포와 스펙트럼을 결정짖는 연구가 수행되었다. 1964년에는 1년간 Harvard 대학에서 N. F. Ramsey교수와 양성자 또는 원자핵의 스핀과 분자회전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새물리, 한국광학회지, 전자공학회지를 통하여 렌즈 설계, 광학용 박막, 측광 및 측색, 전기광학 효과, 레이저광학, 레이저 분광학, 리소그래피 등 광학 전분야에서 모두 11편의 해설논문을 통하여 세계적인 hot issue가 되는 내용을 국내에 소개하셨다.
3) 학술활동과 수상
이상수교수님은 대학 졸업후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중 우리나라 최초의 물리학관련 학술단체로 1952년에 설립된 한국물리학회에 1956년 정회원으로 처음 국내학회에 가입하셨다. 이후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원자력연구소 재직시 한국물리학회의 평의원으로서 본격적인 학회활동을 시작하셨다. 1961년에는 학회 학술지의 발간을 위한 편집위원회의 편집간사와 1973~1974년에는 편집위원장을 맡아 학술지 발간에 기여하셨다. 1973년 4월에 개최된 정기총회에서 물리학회내에 응용물리분과회를 창립하여 초대분과회장으로서 본격적으로 국내의 광학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시게 된다. 한국의 광학분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1974년 9월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광학위원회(ICO :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Optics)총회에 참석한 당시 ICO 사무총장인 Vienot교수를 위시한 프랑스 광과학자 10명을 초청하여 한국과학원에서 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5년 이상수 분과회장이 주도하여 ICO총회에회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여 한국의 회원가입 승인을 얻음으로써 21번째 가입국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1977년 1월에는 재미 한인 레이저 과학자인 김대만박사(Rice대), 김용욱박사(Leheigh대), 김진중박사(North Carolina 주립대), 강민호박사(Texas대) 등을 초청하여 Seoul Laser Symposium을 개최하여 외국의 첨단분야를 국내에 소개하고 국제공동연구를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1979~1981년에는 한국물리학회의 제8대 회장으로서 물리학회가 국제적인 학회로 도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셨다. 한국물리학회가 한국과학재단의 후원으로 주관하여온 이휘소박사 기념강연회의 제3회 강연회의 주제가 레이저물리학 분야로 결정되어 1981년 10월 31일~11월4일까지 5일간 미국의 저명한 레이저 과학자인 A. E. Siegman박사(Stanford대)를 모시고 제3회 이휘소기념 물리학강좌가 한국과학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이상수교수님의 노력으로 국내의 광학분야와 광학산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저변이 확대되어 1981년 10월 정기총회에서 응용물리분과회에서 독립하여 광학 및 양자전자분과회가 설립되었으며 초대(1981~83), 2대(1984~85) 분과회장을 역임하셨다. Sigman교수의 제안으로 1983년 7월1일~21일사이 한국과학재단과 국내 광관련 산업체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국내 최초로 극동 레이저 여름학교(Far Eastern Laser School - Seoul '83)를 한국과학원에서 개최하였다.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20여명, 국내 대학, 연구소, 산업체 등에서 40여명이 정식으로 등록하였으며, 과학원내의 레이저광학 관련 실험실을 모두 동원하여 강의와 실험을 병행하였다. 당시 강사로는 Welford교수(Imperial College)가 Coherent Optics, Walther교수(Munchen대)가 Applications of Lasers, Siegman교수(Stanford대)가 Laser Behavior, Shimoda교수(게이요대)가 Laser Spectroscopy에 대해 강의를 하였다.
1984년 여름 물리학회의 광학 및 양자전자학분과회 주관으로 제1회 광학 및 양자전자학 워크샵을 개최하였으며 이후 매년 여름에 워크샵을 개최하였다. 여기서 평소 이상수교수님의 지론이신 순수학문보다는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응용연구를 중시하시어 광학자뿐만 아니라 산업체가 함께 참여하는 워크샵을 개최하여 우리나라의 광산업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광학분야의 발전에 공학적인 접근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대의를 따라 대한전기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등과 공동으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는 협의가 이루어져 1986년 한국물리학회 광학 및 양자전자학 분과 주관, 대한전기학회 파동 및 양자전자연구회와 대한전자공학회 광파 및 양자전자연구회, 마이크로파 및 전파전파연구회의 후원으로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제1회 파동 및 레이저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1980년대 말 우리나라 광산업체의 증가와 광학 및 레이저에 대한 산업적 연구와 학술적 교류의 요구가 커지면서 독립된 광학회의 창립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이상수 교수님이 주관하여 전기 전자, 기계, 화학 등 광관련 전분야의 중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1989년 10월 한국광학회를 정식을 출범시키고 초대(1989. 10.~1991.2.) 및 2대(1991.3.~1993.2.) 회장을 역임하셨다. 창립총회 당시 참석자 48명으로 출범한 한국광학회는 현재 회원이 4,000명에 육박하는 거대한 학회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교수님께서는 1991년 2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후에도 국내외 학회활동을 활발히 하셨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대표적인 학제간 국제학술대회인 제21회 고속촬영 및 광자공학 국제회의(The 21st International Congress on High Speed Photography and Photonics)를 유치하여 대덕의 과학문화회관에서 1994년 8월에 개최하였으며, 19개국 255명이 참가한 가운데 202편의 논문 발표가 있었다. 이 학술대회가 학자들만의 학술대회가 아닌 우리나라 광산업체에 기여하고자 당시 (주)기아자동차의 후원을 받아 첨단고속촬영기술에 대한 워크샵을 병행으로 개최하여 선진기술을 국내에 소개하고 국내 광산업체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1993년에 이교수님은 국제광학위원회(ICO)의 부회장(1993~1999)으로 선출됨으로서 한국광학계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어서 한국이 ICO의 회원국이 된후 18년만에 3년마다 개최되는 총회인 제17차 ICO총회를 유치함으로서 선진국에서만 개최되든 총회를 개도국에서도 개최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이상수 교수님은 제17차 ICO총회의 대회장을 맡아 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33개국 538명이 참가하였으며 43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1996년에는 레이저 및 광전자 환태평양 국제회의(The Pacific Rim Conference on Lasers and Electro-Optics:CLEO/PR)에서 1999년도 회의 서울개최를 유치하였다. 이교수님은 이 대회의 공동 조직위원장을 맡아 CLEO/PR'99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서울 무역센터 전시관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서는 26개국 820명이 참가하여 모두 68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국내외 유명 광산업체중 51개 회사가 자사의 제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병행하여 명실상부한 산학협력을 이루었다.
이상수교수님은 이러한 국내외의 학술활동과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1975년에 미국광학회(Optical Society of America)의 Fellow로 선출되시고, 1994년 부터는 한국광학회의 명에회장으로 추대되어 학회발전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셨다. 1997년에는 국제광학 및 광자학회(SPIE : International Society for Optics and Photonics)의 Fellow로 선출되셨다. 1976년 10월에는 동곡문화상(동곡문화재단), 1979년 4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4월에는 대한민국 과학상 대통령상, 1989년 7월에는 성곡학술문화상, 1993년 4월에는 성봉물리학상(한국물리학회), 2000년 4월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6년 10월에는 미국광학회에서 수여하는 Esther Hoffman Beller Medal을 수상하셨다.
5. 맺는말
이상수 교수님의 업적을 되돌아보고 새길수록 그 엄청난 스케일과 다양함에 새삼스레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앞으로 과연 후학들 중에 누가 이토록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교수님께서 과학원 초대원장시절 혼신의 힘으로 초석을 다졌던 과학원은 개원 초기 입학정원이 100명이던 것이 지금은 대덕 캠퍼스에서 4,000여명의 재학생이 밤낮으로 연구와 학업에 땀 흘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앖는 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동안 4만여명의 과학원 졸업생은 대학이나 연구소, 산업현장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과 경제 발전을 위하여 기여하고 있다.
교수님께서 20여년간 과학기술원에서 직접 지도하여 배출하신 107명의 석사와 48명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들은 지금 우리나라 대학, 연구소 및 산업체에서 광학계의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260여편의 연구논문을 국내외 전문 학술지에 발표하심으로써 본인의 연구업적은 물론 한국 광학계의 위상을 세계에 높이신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교수님께서 창립하신 한국광학회도 이제는 회원이 3,000명을 넘어서 이제는 안정된 운영체제를 갖추고 날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끝으로 교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일들 중에 못다 하신 일들은 저희 후학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3개월 먼저 세상을 떠나신 사모님 곁에서 이승에서 못 다하신 사랑과 봉사를 하늘나라에서나마 마저 다하시기를 빕니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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