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비보입니까! 갑작스럽게 전달 된 이상수 교수님의 타계 비보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부정하고 싶었었습니다. 어찌하여 교수님께서는 저 사랑스런 아들 며느리,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지중지 하시던 손자손녀, 친지들, 또한 늘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지켜 주시던 제자들을 다 뒤로 던져버리시고 이리 갑자기 떠나시면 저희들은 어떤 길을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 박대윤교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도 제자들을 걱정하시던 것이 생생합니다. 그것이 교수님과 마지막 만남이라니 너무나도 애통하고 가슴이 막혀 교수님의 영면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1973년 3월 한국과학원 학생으로 입학하면서 교수님과 사제의 연을 맺은 지 벌써 37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그때의 근엄하셨던 교수님의 모습이 엊그제 같이 생생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저희에게 학문적인 지식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어떻게 이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원자력연구소 소장, 원자력청장,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시면서 항상 원칙과 규칙을 가장 중시하셨던 것을 여러 사람을 통하여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희 학생에게는 상당히 엄격하시어서 아침8시부터 저녁9시까지 실험실에서 함께 실험을 하시면서 독려하셨습니다. 또한 실험실에서 못하나 종이 한 장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심은 물론 몸소 근검절약 생활을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위 요즈음 말하는 사회적 약자인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나 운전기사, 기능원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시고 너거럽게 대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삶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만 비록 짧게 산 저희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물리학회장, 한국과학기술원장, 초대한국광학회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우리나라 물리학 특히 광학분야를 반석위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1959년 영국의 Imperial College에서 광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자로서 국내에 광학의 씨를 뿌리시고 가꾸셨습니다. 또한 국제광학위원회 등의 국제학회를 통하여 한국의 학문적 지위를 높이심은 물론 후학들의 국제적인 활동무대를 튼튼히 닦아 주셨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22년간 재직하시는 동안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200여명의 저희 제자들의 조그만 발로는 교수님의 크나큰 족적을 도저히 채울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고 비통합니다.
제자들을 항시 인자하게 이끌어 주신 교수님의 모습을 이제 저희는 기억 속에서나 찾아뵈어야 하는 아쉬움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 어린 제자들에게는 교수님이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 보다 넓은 저희들의 버팀목이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 지켜드리지 못하여 죄스러운 마음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 저희 제자들은 교수님의 훌륭하신 선비정신과 인자하신 품격, 빛나는 업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교수님을 잃은 저희는 이제 억지로 눈물을 거두렵니다. 교수님 몇 달전 먼저 가신 못내 애통해 하시던 사모님 곁에서 이승에서 못다 하신 사랑을 나누시면서 영생을 함께 하시기를 저희 제자들은 간절히 빌겠습니다.
2010년 5월 10일
불초제자 이민희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비보입니까! 갑작스럽게 전달 된 이상수 교수님의 타계 비보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부정하고 싶었었습니다. 어찌하여 교수님께서는 저 사랑스런 아들 며느리,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지중지 하시던 손자손녀, 친지들, 또한 늘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지켜 주시던 제자들을 다 뒤로 던져버리시고 이리 갑자기 떠나시면 저희들은 어떤 길을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 박대윤교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도 제자들을 걱정하시던 것이 생생합니다. 그것이 교수님과 마지막 만남이라니 너무나도 애통하고 가슴이 막혀 교수님의 영면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1973년 3월 한국과학원 학생으로 입학하면서 교수님과 사제의 연을 맺은 지 벌써 37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그때의 근엄하셨던 교수님의 모습이 엊그제 같이 생생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저희에게 학문적인 지식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어떻게 이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원자력연구소 소장, 원자력청장,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시면서 항상 원칙과 규칙을 가장 중시하셨던 것을 여러 사람을 통하여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희 학생에게는 상당히 엄격하시어서 아침8시부터 저녁9시까지 실험실에서 함께 실험을 하시면서 독려하셨습니다. 또한 실험실에서 못하나 종이 한 장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심은 물론 몸소 근검절약 생활을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위 요즈음 말하는 사회적 약자인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나 운전기사, 기능원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시고 너거럽게 대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삶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만 비록 짧게 산 저희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물리학회장, 한국과학기술원장, 초대한국광학회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우리나라 물리학 특히 광학분야를 반석위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1959년 영국의 Imperial College에서 광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자로서 국내에 광학의 씨를 뿌리시고 가꾸셨습니다. 또한 국제광학위원회 등의 국제학회를 통하여 한국의 학문적 지위를 높이심은 물론 후학들의 국제적인 활동무대를 튼튼히 닦아 주셨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22년간 재직하시는 동안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200여명의 저희 제자들의 조그만 발로는 교수님의 크나큰 족적을 도저히 채울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고 비통합니다.
제자들을 항시 인자하게 이끌어 주신 교수님의 모습을 이제 저희는 기억 속에서나 찾아뵈어야 하는 아쉬움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 어린 제자들에게는 교수님이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 보다 넓은 저희들의 버팀목이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 지켜드리지 못하여 죄스러운 마음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 저희 제자들은 교수님의 훌륭하신 선비정신과 인자하신 품격, 빛나는 업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교수님을 잃은 저희는 이제 억지로 눈물을 거두렵니다. 교수님 몇 달전 먼저 가신 못내 애통해 하시던 사모님 곁에서 이승에서 못다 하신 사랑을 나누시면서 영생을 함께 하시기를 저희 제자들은 간절히 빌겠습니다.
2010년 5월 10일
불초제자 이민희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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