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위원소회지(한국동위원소협회 : KRA) 원고

* 인 물 탐 구 *
이 상 수(李 相 洙)박사 (1925~ )

新溟(신명) 李相洙박사님은 1949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신 후 서울대 강사와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던 중 1955년 영국정부 국비장학생으로 선정되어 London대학 Imperial College 대학원으로 유학의 길을 오르게 되였으며, 1959년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이학박사(광학전공)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0년 귀국하여 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신인 원자력원(원장 김법린) 원자력연구소에서 기초연구부장에 이어 물리학연구실장에 임명을 받으면서 원자력연구와 관리의 인연을 맺게 되였다.


당시 물리학연구실에서는 원자력과 관련한 기초물리학연구과제로서 원자로재료의 중성자 흡수단면적측정연구, 핵반응 및 구조연구, 열중성자 회절 및 산란연구, 중성자발생장치 설계 제작 및 발진연구, 핵분광학연구, 방사선 계측연구, 로재료의 방사선 상해연구, 고체물리학 실험연구, 핵 및 입자물리학 이론연구, 광학연구 등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상수실장님은 물리학연구실의 연구방향과 추진계획 그리고 연구성과 등을 총괄하는데 간단없이 전력을 다하였으며 국내 원자력 관련 물리학의 기초 및 응용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셨다.


더욱이 본인의 전공분야인 광학연구에서는 기초와 원자력과의 응용을 병행하는 방침으로 광학실험실을 이끌며, 당시로서는 국내 최초로 광학연구실 다운 실험실을 갗추어 놓았다. 자체 설계제작한 간섭계를 이용하여 원자스펙트럼의 선폭측정연구, 원자의 초미세구조의 분광학적 연구, Co-60 동위원소 또는 TRIGA-II 원자로에서 방출하는 Čerenkov복사의 이론적 해석과 원자로 출력과의 상관관계 연구, 방사선 계측에 이용하기 위한 CaF₂, LiF, Muscovite, 등의 방사선 상해 및 열형광 방출에 관한 이론 및 실험연구, 다중반사간섭법에 의한 박막광학연구, He-Ne 혼합기체 중성원자 레이저와 고체 Ruby 레이저의 설계제작과 응용연구, Imaging Spark Chamber 연구, 원자핵과 Gamma-ray 공명연구 등을 수행하여, 원자력연구와 광과학과의 융합연구 그리고 실험연구의 국내 토착화에 큰 힘을 쏟았다. 이상수박사님은 원자력 관련 수행연구업적을 일찍이 인정 받아 제6차 원자력학술회의에서 원자력원(원장 윤일선박사)으로부터 우수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상수박사님은 1964년에 레이저연구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당시 누구도 구상치 못했던 획기적 연구과제로서 국내 레이저연구의 첫 걸음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같은 이박사님의 선견은 지금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후진들은 활발한 레이저기초 및 응용연구를 계속하며, 다대한 연구성과를 얻어 오고 있을 뿐 더러, 뒤이어 국내 많은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산업체에서도 레이저응용연구에 적극 동참하는 파급효과를 갖게 되였다.


1초를 아끼시며 바쁜 나날을 보내시던 중에서도, 이박사님은 1964년부터 1년 동안 Harvard대학 Lyman Lab.에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N.F. Ramsey교수와의 공동 연구로 양성자 또는 원자핵의 스핀과 분자회전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룰 수행하였고, 귀국하면서 국내 원자력에 필요한 많은 과학기술정보와 관련 과학자 및 전문가를 만나 학술적 교분을 두텁게 하여 원자력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열의도 보였다.


1967년 원자력청 원자력연구소 8대 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재임시에는 동위원소생산과 중성자회절 및 산란실험연구 등에서 갈망하던 부족한 원자로 열중성자 선속을 조금이라도 해소시키기 시키기 위하여 100kW TRIGA-II의 출력을 250kW로 높이는 Project(책임자 김동훈박사)를 우선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당시 로심설계와 열변환설계등은 로공학부 팀이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추진하였고, 최종 250kW 열출력을 갖는 TRIGA-II 연구용 원자로 출력증강 project를 성공리에 완료하였다. 한편 더욱 도약하는 원자력연구를 도모하기 위하여 MW급의 연구용 원자로의 설치를 계획하였으며, 이상수소장님은 선정위원회를 직접 주관하시고, 계약과 설치의 바쁜 시간을 보낸 후 당시로서는 가장 한국 실정에 적합한 2MW급 TRIGA-III를 제2호기 연구용 원자로를 확보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1970년에 원자력청장에 취임하면서 1967년부터 활동하여 왔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에 한국교차대표 등으로 국제활동을 적극화 하였으며, 많은 원자력선진국의 국제적 인사들과도 폭 넓은 교류를 가짐으로서 한국의 원자력연구 및 산업적 연구사업에서의 국제협력과 교류증진 등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1970년 10월에는 국내 최초로 IAEA와 원자력연구소가 공동주체하는 ‘개발도상국에서의 방사선가공처리기술’이라는 국제회의를 유치하고, 서울 타워호텔에서 한국, 미국, 프랑스, 일본, 인도, 파키스탄, 호주, 타이완, 태국, 필립핀, 싱가폴 등 11개국의 28명의 대표참가자와 발표자, 80여명의 원자력관계 국내 참가자와 함께 5일동안 방사선가공처리기술과 연구에 관한 의미있는 국제학술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원자력을 해외에 알리는 홍보와 교류의 효과 등 유치의 큰 성과를 얻었다. 한편 이상수청장님은 대단위 방사선 조사시설확보를 위하여 미국원자력위원회(US-AEC) 위원장인 T.G.Seaborg박사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면서, UNDP자금과 내자지원을 받아 10만 Ci Co-60 Gamma선 조사시설 확보하고 승인을 받는 사업을 완수 하였다.


1971년 정부는 국내 고급 과학기술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거대한 사업의 하나로 정부출연 기관으로 한국과학기술원(지금의 KAIST, 설립자 대통령)의 설립을 확정하고, 초대원장으로 이상수박사님을 임명하였으며, 따라서 이박사님은 11년간의 공릉동의 원자력연구소에서의 연구와 관리의 많은 기여와 아쉬움을 뒤로 하시고, 또 하나의 중대한 국가적 과학기술사업을 위하여 한국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기여 근무하게 되였다.


정부는 한국과학원의 부지로 홍릉의 돌산 한 기슭을 배정 하였고, 이상수원장님은 초창기 몇 안되는 교직원과 함께 과기원 건설업무, 조직, 예산계획, 교수충원, 교과 및 교무계획, 연구 및 교육기자재구입, 제반운영규정등 교육기관으로서 반드시 갗추어야 할 산적한 업무를 혼신의 힘을 다하시며 빈틈 없이 수행하였다. 1973년 마침내 첫 입학생을 갖게 되였고, 계속 육성 시키므로서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원을 명문의 과학기술의 교육과 연구의 터전을 이루는데 더없이 큰 기여를 하였다. 1989년에 이르러서는 원내에서 6대 과기원 원장으로 재차 추천되어서 성숙된 과기원을 이룩하는데 남다른 기여와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상수박사님은 과학기술원 물리학과 교수로 봉직하면서, 전공인 광학분야에 대한 교육과 연구에 더욱 심도 있는 열정을 쏟으셨으며, 기초와 응용연구 그리고 산학연협동연구과제 사이의 고리를 넓게 그리고 확실하게 수행 함으로서, 과기원 본연의 창립의 뜻을 잘 지켜 주기도 하였다. 기하광학, 파동광학, 레이저광학, 양자광학등의 광과학의 전과목들을 오랫동안 직접 강의하였을 뿐 더러, 석박사과정의 젊은 학생들이 교육과 연구과정에서 이론과 실험을 함께 겸비하는 교육방침을 지키므로써 유능하고 유망한 전문고급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20년을 넘는 과학기술원 교수로 근무하시면서 석사 100여명, 박사 50여명을 배출하였으며, 지금 40~50대 이르른 이들은 전국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산업체에서 교수로 또는 핵심연구요원으로 교육과 연구에 괄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마도 이들이 배출한 2세대의 석박사를 합치면 수백명을 넘는 광과학기술 요원들이 국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상수박사님은 연구소와 과학기술원에 근무하면서 발표한 전문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만도 220편을 상회하며, 파동광학, 레이저광학, 양자광학 등 전문저서 6권과 광학, 양자전자공학 등 번역서 7편 그리고 정부출연연구비, 특수연구기관 그리고 기업체 연구소 등과의 위탁연구과제 수행에 따른 80여편 이상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주옥 같은 연구업적은 지금도 중요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수박사님은 국내외 학회와 학술단체에서의 봉사에도 대단한 활동을 하였다. 그간의 주요활동만 열거하면, 국내에서는 1981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종신), 1982년 한국물리학회 회장, 1983년 과우회 부회장, 1984년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1989년 한국광학회 초대회장(현재는 명예회장), 한국원격탐사학회 회장, 1990년 서울평화상 심사위원, 1994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부원장(창립이사), 국제적 활동으로는 1981년 국제광학위원회(ICO) 한국위원장, 1991년 AIT공대(Bangkok) 이사, 1992년 UN대학(Tokyo) 이사, 1995년 ICO 부회장, 1995년 미국광학회(OSA) Fellow(종신), 1997년 국제광공학회(SPIE) Fellow(종신), 영국물리학회(IOP) Fellow(종신)로 활동하고 있다.


이상수박사님은 위와 같은 교육과 연구의 성과를 정부와 학계에서 항상 높이 평가 받아, 대한민국 모란장(1979), 대한민국 과학기술 대통령상(1982), 성곡학술문화상(1989), 대한민국 문화훈장 모란장(1982), 성봉상(한국물리학회 1992), 인촌상(2000), 대한민국 문화훈장 무궁화장(2000) 등과 학계에서의 공로상을 여러회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상수박사님은 1925년10월4일 부친 이대벽(李大闢)공과 모친 박수암(朴壽岩)여사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시어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1955년 사모님이신 서숙원(徐淑源)여사(약학사, YWCA 이사)와 결혼하셔서 슬하에 두 아드님과 세손을 두시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계시며. 두 아드님도 모두가 과학기술계에서 교수와 연구원으로 봉직하고 있다. 또한 오래전 일이지만 이박사님이 평소의 가득한 효심으로 양친을 섬기는 모습을 필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연구와 교육자로서, 기관장으로서, 학회장으로서 50여년을 한결 같은 신념으로 지내 오신 이상수박사님은 후진 양성에서는 창의적이고 가시적인 지식만을 터득하도록 지도하여, 모두가 확실한 자립심을 가추는 인재가 되도록 인도하였고, 기관장으로는 정직성과 책임감 그리고 화합에 소신을 두고 직무를 완수해 오셨습니다.


요지음은 학술원회원으로,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로서 그리고 한국광학회 명예회장으로서 비교적 적은 업무를 감당하시면서, 계속 후진들과의 교신을 가지며 평화로운 노년기를 보내고 계시다.


이상수박사님은 이 시대가 꼭 필요로하는 학자로서, 과학기술계의 선도적 지도자로서 필자를 비롯한 많은 후진들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작성 - 2005년 12월 박 대 윤( 인하대 명예교수)



추모사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비보입니까! 갑작스럽게 전달 된 이상수 교수님의 타계 비보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부정하고 싶었었습니다. 어찌하여 교수님께서는 저 사랑스런 아들 며느리,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지중지 하시던 손자손녀, 친지들, 또한 늘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지켜 주시던 제자들을 다 뒤로 던져버리시고 이리 갑자기 떠나시면 저희들은 어떤 길을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 박대윤교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도 제자들을 걱정하시던 것이 생생합니다. 그것이 교수님과 마지막 만남이라니 너무나도 애통하고 가슴이 막혀 교수님의 영면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1973년 3월 한국과학원 학생으로 입학하면서 교수님과 사제의 연을 맺은 지 벌써 37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그때의 근엄하셨던 교수님의 모습이 엊그제 같이 생생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저희에게 학문적인 지식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어떻게 이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원자력연구소 소장, 원자력청장,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시면서 항상 원칙과 규칙을 가장 중시하셨던 것을 여러 사람을 통하여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희 학생에게는 상당히 엄격하시어서 아침8시부터 저녁9시까지 실험실에서 함께 실험을 하시면서 독려하셨습니다. 또한 실험실에서 못하나 종이 한 장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심은 물론 몸소 근검절약 생활을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위 요즈음 말하는 사회적 약자인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나 운전기사, 기능원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시고 너거럽게 대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삶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만 비록 짧게 산 저희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물리학회장, 한국과학기술원장, 초대한국광학회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우리나라 물리학 특히 광학분야를 반석위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1959년 영국의 Imperial College에서 광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자로서 국내에 광학의 씨를 뿌리시고 가꾸셨습니다. 또한 국제광학위원회 등의 국제학회를 통하여 한국의 학문적 지위를 높이심은 물론 후학들의 국제적인 활동무대를 튼튼히 닦아 주셨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22년간 재직하시는 동안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200여명의 저희 제자들의 조그만 발로는 교수님의 크나큰 족적을 도저히 채울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고 비통합니다.

제자들을 항시 인자하게 이끌어 주신 교수님의 모습을 이제 저희는 기억 속에서나 찾아뵈어야 하는 아쉬움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 어린 제자들에게는 교수님이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 보다 넓은 저희들의 버팀목이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 지켜드리지 못하여 죄스러운 마음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 저희 제자들은 교수님의 훌륭하신 선비정신과 인자하신 품격, 빛나는 업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교수님을 잃은 저희는 이제 억지로 눈물을 거두렵니다. 교수님 몇 달전 먼저 가신 못내 애통해 하시던 사모님 곁에서 이승에서 못다 하신 사랑을 나누시면서 영생을 함께 하시기를 저희 제자들은 간절히 빌겠습니다.

2010년 5월 10일
불초제자 이민희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Copyright (c) Sang Soo Lee, 이상수


2010.5.10일 아침 KAIST 홍릉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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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emoriam: Sang Soo Lee

10 May 2010

Sang Soo Lee, known as the "Father of Optics" in Korea passed away on May 7, 2010, in Korea. He was 84.

Lee received a B.S. in Physics from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Korea and a Ph.D. from Imperial College of Science and Technology, University of London, UK. Receiving the first Ph.D. in Optics in Korea, Dr. Lee devoted his life to lay the foundation for optical science and engineering for more than four decades as an educator, researcher, and administrator in science policy.

"He was one of the architects of the extraordinary and rapid emergence of Korea as a world leader in science and technology, or perhaps with the rich history of contributions centuries ago, re-emergence would be more appropriate." said Eugene G. Arthurs, SPIE Executive Director.

During his teaching career, Dr. Lee mentored 50 doctoral and more than 100 masters' degree candidates. in the areas of laser physics, wave optics, and quantum optics. Many of his former students have become leaders in academia, government-funded research institutes, and industry both in Korea and abroad. He published more than 250 technical papers and authored five textbooks, including "Wave Optics", "Geometrical Optics", "Quantum Optics", and "Laser Speckles and Holography".

Lee was the first president of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KAIST), and the first president to establish a new government funded graduate school. He played a pivotal role in founding the Optical Society of Korea (OSK) in 1989 and served as its first president.


Lee was an active member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unity. In addition to his pioneering scholastic achievements at KAIST, he served as the Vice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Optics (ICO), a Council Member of the Third World Academy of Sciences, and a Council Member of UN University, serving as an ambassador for the optics community, which showed a significant example of how a developing country like Korea can serve international optics community.


Dr. Lee was a Fellow of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Optical Engineering (SPIE), the Optical Society of America (OSA), and the Korean Physical Society (KPS). He was the recipient of many awards and honors, including the National Order of Civil Merit that is the Presidential Medal of Honor from the Republic of Korea (2000), the Songgok Academic Achievement Prize, the Presidential Award for Science, and the Medal of Honor for Distinguished Scientific Achievement in Korea. In 2006, he was awarded OSA's Esther Hoffman Beller Medal .


http://spie.org/x40527.xml




OSA Mourns the Loss of Sang Soo Lee, 1925-2010

Sang Soo Lee, an OSA Fellow and a Professor Emeritus at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KAIST), passed away on May 7, 2010, in Korea. He was 84.


Known as the “Father of Optics” in Korea, Dr. Lee was the first scientist with a Ph.D. degree in optics in his country, and he nearly single-handedly laid the foundation for optical science and engineering there. During a career spanning more than four decades, he was active as an educator, researcher and author. He played a central role in establishing the Optical Society of Korea (OSK) in 1989 and served as its first president, and he also served as the first president of KAIST (1971-72).


Dr. Lee received a B.S. in Physics from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Korea (1949) and a Ph.D. from Imperial College of Science and Technology, University of London, UK (1959). From 1960-70, he worked at the 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KAERI), first as Head of the Physics Research Division (1960-67), and then as Director (1967-70). After a year as Director General of the Office of Korea Atomic Energy (1970-71), Dr. Lee went to KAIST, which was the newly established graduate school of science and technology, fully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 He was named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Physics in 1971 and remained in that position until 1989. From 1989-91, he again served a term as President of KAIST.


During his teaching career, Dr. Lee mentored 50 doctoral and more than 100 masters’ degree candidates. Many of his former students have become leaders in academia, government-funded research institutes, and industry. He published more than 250 technical papers and authored five textbooks, including Wave Optics, Ray Optics, Quantum Optics and Laser Speckles and Holography.


Dr. Lee was an active member in the scientific community. In addition to his pioneering scholastic achievements at OSK and KAIST, he served as the Vice President of the Korean Federa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Societies (1995-97), the Korean Academy of Science and Technology (1992-95), and the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Optics (ICO) (1993-1999). He was a Council Member of the Third World Academy of Sciences, and a Council Member of UN University, serving as an ambassador for the optics community.


Dr. Lee was a Fellow of the OSA (1975),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Optical Engineering (SPIE), and the Korean Physical Society. He was the recipient of many awards and honors, including the National Order of Civil Merit that is the Presidential Medal of Honor from the Republic of Korea (2000), the Songgok Academic Achievement Prize, the Presidential Award for Science, and the Medal of Honor for Distinguished Scientific Achievement (Republic of Korea). In 2006, he was awarded OSA’s Esther Hoffman Beller Medal “for laying the foundation for optical science and engineering in Korea through forty-plus years of teaching and research.”


http://osa.org/about_osa/newsroom/obituaries/sangsoolee.aspx





한국광학회 명예회장이신 이상수 KAIST 명예교수님께서 2010년 5월 7일 오후 2시 30분께 숙환으로 별세하셨다.



향년 85세. 李 명예교수는 거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우리나라 광학계의 발전을 위하여 1989년 한국광학회를 창립하시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신 이후 20여년간 원로이자 명예회장으로서 한국과학계와 세계속에서 한국광학회의 위상을 드높이셨다.


이 명예교수께서는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시고 영국 Imperial College of Science and Technolog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4부터 1965년까지 Harvard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물리학 연구부를 이끌었으며, 1967년에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이 되었다. 1970년에는 한국 원자력청장을 역임했으며, KAIST 초대총장을 지냈다.


李 명예교수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1981), 한국물리학회 회장(1979-1981), 한국 광학회 회장(1989)을 역임하였고, 미국 광학회와 영국 물리학협회의 펠로우이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Optics의 부회장을 역임, 1989년부터 1995년까지 UN 대학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훈으론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 성곡문화상, 인촌상, 미국광학회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파동과학, 레이저광학, 기하광학, 양자광학, 레이저 스펙클라 홀로그라피 등 다수가 있다.


李 명예교수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원자로의 체렌코프 방사에 관한 연구'를 했다. 원자로의 긴급정지 시점에서부터 체렌코프 방사의 붕괴모드를 측정함으로써 r-선의 분광학을 완성시켰다. KAIST에서는 레이저 개발을 연구, phase conjugate work의 발생에 이용되는 가변 분극 염료 레이저(variable polarization dye laser)와 다양한 재료가공법에 사용되는 요오드 광해리 레이저(iodine photo-dissociation laser)를 설계하는데 조력했다. 엑스선 광학을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수차가 거의 없는 four-mirror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명예교수는 또한 2006년도 미국광학회상 (Esther Hoffman Beller 메달)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李 명예교수는 광학공학 교육에 대한 뛰어난 공헌과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도와 연구를 통해 한국광학공학의 토대를 마련한 공로로 이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유족으로는 2남을 두었으며 발인은 5월 10일 8시 삼성의료원.


(상보: 연합뉴스)
http://photo.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01&newsid=20100507203308134&p=newsis )


본적 강원도  강릉시 성남동
출생 1925년 10월 4일 함경남도 신흥태생
사망  2010년 5월 7일 서울특별시 경희의료원

학력

1949년 6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3회) 졸업
1956년 영국 런던대학교 임페리얼 칼리지 전문석사 학위 취득
1959년 영국  런던대학교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이학박사 학위  취득

경력

1954~60년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
1960년 원자력연구소  연구관, 물리학연구실장
1967년 원자력연구소  소장
1967~70년 국제원자력기구 (IAEA) 한국대표
1968년 하바드대 Ramsey 연구실 초빙연구원
1970년 원자력청 청장
1971년 한국과학원(KAIS) 초대원장
1971~9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교수
1981년~ 대한민국  학술원 정회원
1982~84년 한국물리학회  회장
1984~87년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1987년 일본이화학연구소(RIKEN) 초빙연구원
1989년 원격탐사학회  회장
1989년 2월 24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6대원장
1989~93년 한국광학회  회장
1991년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1993년 한국광학회  명예회장
1993~99년 국제광기구(International Commission for Optics) 부회장
1994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KAST) 창립이사 부회장
1997년 국제광공학회 (SPIE) Fellow

교육 및  연구

1972~1992년 KAIST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후학양성 : 50명의 박사와 100여명의  석사를 지도했고 230여 편의 논문을 발표.
물리학분야: 기하광학, 간섭 및 회절광학, 원자분광학, 박막광학, 레이저  물리학 및 레이저응용, 비선형광학, 양자광학, TW급 고출력 레이저 설계 및 연구
원자력분야: Cerenkov 복사에 의한 노출력 상관관계, 방사선  검출 및 이용연구, 열광학, 색중심 연구, 감마선 공명, MW급 연구용 원자로 선정  및 가동 이용, 50만 큐리 Co-60 조사시설  설치 및 실용화
특히 고인이  개발한 광분해 옥소레이저는 독일, 러시아에  이은 큰 성과였고 고출력 이산화탄소레이저도 창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 받았으며 레이저개발과 광학 이론을 발전시켜 한국의 광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음.
봉사:1983년 과우회  부회장1991년 태국 방콕 AIT공대이사 1992년 일본도쿄 UN대학이사제3세계 아카데미  이사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 역임.

상훈
1976.10.30. 동곡문화상 (동곡문화재단)
1979. 4. 21. 대한민국 문화훈장 모란장
1982.4. 21. 대한민국  과학상 대통령상1989. 7. 14. 성곡학술문화상1993. 4. 19 한국물리학회  성봉상2000년 인촌상2000. 4. 21.  대한민국  문화훈장 무궁화장2006. 10.  미국광학회 Esther Hoffman Beller Medal
“40년 이상의 교육과 연구를 통하여 한국 광과학과 광공학의 기반을 조성하신 공로”

 저서 : 파동과학, 레이저광학, 기하광학, 양자광학, 레이저 스펙클라  홀로그라피 등 다수.

 유족 :
아들 영식, 형식 며느리 김혜영 최진희 손자 : 이은섭 이민섭 이윤섭 이혜섭

[참고자료]이상수 약력, (박대윤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정리)이상수 회원 회고 (이민희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정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위키피디아 이상수(광학자)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EC%88%98_%28%EA%B4%91%ED%95%99%EC%9E%90%29

한국과학원 초대원장 이상수 교수 별세

뉴시스 | 박병립 | 입력 2010.05.07 20:33


【대전=뉴시스】박병립 기자 = KAIST(총장 서남표) 물리학과 이상수 명예교수가 7일 오후 2시 30분께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 이 명예교수는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영국 런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기술의 불모지인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고인은 1967년 원자력연구소 소장, 1970년 원자력청장 등을 역임한 뒤 1971년 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의 초대원장과 1989년 KAIST 6대 원장을 맡아 과학계를 이끌어다.

또 1972~1992년 KAIST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후학양성에 힘썼으며 50명의 박사와 100여명의 석사를 지도했고 23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고인이 개발한 광분해 옥소레이저는 독일, 러시아에 이은 큰 성과였고 고출력 이산화탄소레이저도 창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레이저개발과 광학 이론을 발전시켜 한국의 광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한국물리학회장, 한국광학회장 등을 지냈고 태국 방콕 AIT공대이사, 일본도쿄 UN대학이사, 제3세계 아카데미 이사,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도 역임했다.

상훈으론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 성곡문화상, 인촌상, 미국광학회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파동과학, 레이저광학, 기하광학, 양자광학, 레이저 스펙클라 홀로그라피 등 다수가 있다.

유족으로는 영식(경희대 교수), 형식(프리즘주식회사 이사)씨 등 2남이 있으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0일 오전 8시다.

bartong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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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daum.net/nms/service/news/cluster/view_news?newsid=20100507203308134&cateid=1067&p=newsis


원로 물리학자 이상수 전 KAIST 원장이 7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5세.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고인은 1925년 함남 신흥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이화여대와 KAIST 물리학과 교수, 원자력연구소 소장, 원자력청장, 한국광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 인촌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영식 경희대 교수, 형식 (주)프리즘 이사와 며느리 김혜영 용인대 교수, 최진희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0일 오전 8시. 02-3410-6916


김상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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